매일매일/500자 글 하나

“검은 머리가 더 잘 어울려요, 언니.”

얼음조각 2020. 5. 30. 10:27

이름으로만 불리며 지낸 지 10년이 넘었다. 성을 뺀 이름으로 불리겠다고 생각한 건, 호주제 폐지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성을 함께 쓰는 방식과 아무 성도 쓰지 않는 방식 중 성을 쓰지 않는 쪽을 택했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복잡다단한 가정사를 반영해서 성을 모두 쓰면, 이름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이다. 막상 이름으로만 소개하고 불리니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온전한 나로 불리는 느낌이었다.

졸업하기 전부터 그렇게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졸업한 뒤 만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땐 당연히  ‘도 씨는 아니고요.’라는 말과 함께 이름만으로 소개했다. 그럼에도 간혹 내 성이 뭔지 궁금해하거나 곧이 성을 붙여 나를 부르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불쾌하다.

자신이 가진 생각이나 정체성을 부정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글자 하나, 단어 하나, 말 한마디를 얼마나 예민하게 감각하게 되는지 말이다. 그렇게 예민한 감각은 불쾌함 뿐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어처구니없이 감동하게도 한다.

이태원 클라쓰에서 만난 ‘언니’라는 단어 하나가 내겐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마음을 울렸다.

주방을 맡은 현희의 성 정체성을 안 다음 요리 실력을 지적하며 해고해야 한다고 몰아붙인 이서였다. 현희라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유로 그렇게 대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충분해 보였다. 그런 부담을 안고 계속 요리를 만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만족할 때까지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마음은 어땠을까? 새로이의 격려와 노력으로 이서의 ‘맛있다’는 인정을 받은 뒤 듣게 된 ‘언니’라는 말은 드라마에서 연출된 모습과 달리 복잡하고 표현하기 힘든 감정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차별받은 숱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정체성을 확인한 뒤 요리 실력을 문제 삼는 모습은 ‘정체성을 이유로 한 반응’으로 받아들여지기 충분하다. 다수자로 서 있을 때 예민하고 조심해야 할 이유다.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면,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 하루만 자신의 이름을 한 글자만 틀리게 계속 불러 달라고 부탁해보라. 딱 하루 단 한 글자만 틀리게 불렸을 뿐인데 불편한 마음 때문에 예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언니로 불리고 싶은 이들은 언니로 부르면 된다. 이름으로 불리거나 자신이 원하는 별칭으로 불리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부르면 된다. 단지 그렇게 불리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된다. 자신이 불리기 원하는 것, 그러니까 정체성은 ‘판단’이 아니라 ‘인정’하며 ‘존중’해야 한다.

 ‘언니’라는 단어 하나에 어이없이 코끝이 찡해지는 일은 ‘이상한 일’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