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연기파 배우의 산책길

얼음조각 2020. 11. 11. 06:26

 겨울이 오고 있다. 스치는 바람이 차갑고, 6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겨울이 느껴진다. 한 달에 15일만 매일 1만 걸음을 걸으면 5,000원 캐시백을 해준다는 카드에 힘입어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바람도 차갑고 어두우니 기왕이면 햇볕 좋고 밝은 낮에 걸으면 좋으련만 그게 잘 안 된다. 오늘도 6시 넘어 어둑어둑한 산책길을 걸었다.

산책할 때 음악을 듣거나 읽은 책 메모 내용을 mp3로 변환한 파일을 들으며 걷는다. 저시력인 내가 이어폰까지 끼고 어두운 산책길을 걷는 게 위태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산책하며 사람과 부딪친 일은 거의 없다. 대게는 나를 본 사람들이 피해서 갔고 나 또한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멈추거나 천천히 걸으며 주의했다. 내가 부딪칠 위험을 겪을 때는 산책 나온 어린아이 또는 강아지를 만났을 때다. 그 존재들은 나를 보고 피해 주지 않거나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도 하니까… 그런데 오늘 산책길에서 강아지도 어린아이도 아닌 성인 남성인 듯한 사람과 왼쪽 어깨 아래를 제대로 부딪쳤다. 사실 부딪친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부딪친 뒤 내가 돌아서서 허리를 굽혀 미안함을 표했을 때 아무 말 없이 정적이 흐른 것 때문에 중년 남성이었을 거로 추측하는 거다. 부딪쳤을 때를 생각하면, 내가 그 사람보다 키가 크고, 어두운색 마스크를 낀 채 점퍼에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내가 좀 무섭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허리를 굽혀 미안함을 표한 뒤에도 아무 인기척이 없었는데 멀리 가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니까…

갑자기 무서운 느낌이 확~ 밀려왔는데, 어쩐지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뒤돌아서 가던 길을 걷는데 자꾸 뒤에서 중년 남성이 막 소리치며 쫓아올 것만 같아 무서웠다. 발걸음을 빨리해 산책길을 벗어났다. 집 근처 산책길과 이어진 다리까지 두 번 돌면 1만 걸음을 걸을 수 있다. 1만 걸음을 채우기 위해 두 번째로 산책길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여전히 아까 그 남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이어폰을 더 꼭 끼고 볼륨을 조금 더 크게 높이며 걸었다. 키가 있으니까 못 들은 척 지나가도 선뜻 나를 잡아 새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진작 떠났기 때문인지 나에게 화를 내며 달려드는 중년 남성은 없었다. 

 저시력인 내가 누군가와 길에서 부딪치는 일은 거의 없다. 간혹 부딪친다 해도 그건 나와 부딪친 사람이 휴대폰을 보며 걷거나 대화를 나누며 다가오다가 나를 보지 못하고 부딪친 때였다. 사람 목소리가 들리거나 눈에 들어오면 일단 천천히 걷거나 잠시 멈추니 나 때문에 사람과 부딪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와 부딪치면 반사적으로 사과부터 하는데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 차원만은 아니다. 그야말로 반사적으로 사과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얼른 사과해서 내 시력이 드러나지 않도록 빨리 수습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경험상 내 시력이 ‘드러나서’ 좋은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오늘 나와 부딪친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말없이 허리를 좀 굽혀 사과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 것만으로 불쾌함이 가시지 않았을까? 밤에 길을 걷다가 부딪친 사람이 어두운 마스크와 점퍼 모자까지 뒤집어쓴 키 큰 남자라서 놀랐을까?

누군가와 부딪치는 일은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조금 강하게 부딪치는 일도 드문드문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어둑어둑한 시간에 부딪혀 조금 더 상대방이 조심스럽게 느껴진 것뿐이다. 그러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저녁인 거다.

그럭저럭 내 시력은 적당히 드러나지 않은 듯한 저녁 산책길. 나는 어느새 몸에 스민 내 뛰어난 연기력을 생각해본다.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발휘되지만, 혼자 곰곰이 생각하면 씁쓸하고 심란한 그것….. 

집 근처 산책길을 연기파 배우가 되어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