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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후보 공보에 지역구 공약이 빠져있다.

얼음조각 2020. 4. 7. 23:23

집에 들어오며 습관처럼 우편함을 살피는데 모든 우편함에 뭔가 하나씩 꽂혀있었다. 공보물이었다. 특히, 우리 집 우편함은 두 배로 꽉 차 있었는데 점자 공보물 때문이었다. 비례 위성 정당 난립으로 성에 차지 않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마저 누더기가 된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그들이 보낸 ‘나 뽑아줍쇼. 이것저것 (말만)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채워진 공보물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았다.

볼 수 없는 인쇄된 공보물은 재활용을 모으는 박스에 던져버렸다.

오늘, 일 때문에 점자 공보물을 챙겨 나갔다. 기다리는 동안 점자 공보물을 읽었다. 후보자 이름과 소속 정당 등 기본 정보와 뽑아달라는 후보자 말이 있었다. 국회의원이 되면 정권 재창출에 힘을 보탠다는 둥 지역구에 관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소리만 적혀 있었다. 그렇게 점자 공보물은 끝나버렸다. 화장실 가서 뒤처리를 깔끔하게 안 하고 일어선 느낌이었다.

“이 양반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잖아. 뭐지?”

집에 돌아와 선관위 사이트에서 내가 본 후보 공약집을 다운로드받아 읽었다. 점자 공보물 마지막 페이지 내용 뒤로 이어지는 지역구 공약이 실려 있었다.

황당했다.

  • ::공직선거법 - 제65조(선거공보)::

②제1항의 규정에 따른 책자형 선거공보는 ::대통령선거에 있어서는 16면 이내로, 국회의원선거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선거에 있어서는 12면 이내로, 지방의회의원선거에 있어서는 8면 이내로 작성:: 하고, 전단형 선거공보는 1매(양면에 게재할 수 있다)로 작성한다.

④후보자는 제1항의 규정에 따른 선거공보 외에 시각장애선거인(선거인으로서 「장애인복지법」 제32조에 따라 등록된 시각장애인을 말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을 위한 선거공보(이하 "점자형 선거공보"라 한다) 1종을 ::제2항에 따른 책자형 선거공보의 면수 이내에서 작성:: 할 수 있다. 다만, 대통령선거ㆍ지역구국회의원선거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선거의 후보자는 점자형 선거공보를 작성ㆍ제출하여야 하되, 책자형 선거공보에 그 내용이 음성ㆍ점자 등으로 출력되는 인쇄물 접근성 바코드를 표시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개정 2008. 2. 29., 2010. 1. 25., 2015. 8. 13., 2018. 4. 6.>

지역구 출마 후보 공보에서 지역구 공약 내용이 빠진 건, 공직선거법 65조 문제 때문이었다. 초성과 모음, 종성을 한 칸에 모두 쓸 수 있는 일반 인쇄물과 달리 점자 공보는 점자 특성상 분량이 두 배 이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칸에 한 글자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 안녕하세요?
  • ᆼㅏㄴㄴㅕㅇㅎㅏᆺㅔㅇㅛ?

이런 식이다. 물론 점자에도 한 칸에 초성과 모음, 종성을 쓸 수 있는 ‘약자’가 있긴 하다. 하지만, 모든 글자가 약자로 표현될 수는 없다. 위와 같이 쓰이는 점자 특성을 무시한 채 인쇄 공보와 동일한 분량으로 규정했으니 탈이 날 밖에…

공보뿐 아니라 점자 투표 보조 용구도 필요한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 예컨대, 지역구 점자 투표 보조 용구의 경우 딸랑 ‘기호’만 적혀있다. 후보 이름도 소속 정당 이름도 알 수 없다. 투표 사무를 보는 공무원에게 투표용지에 적힌 후보 이름과 소속 정당을 소리 내서 한번 읽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그렇게 찍을 후보와 정당을 결정하고 투표소에 들어가 기표하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곳에 잘 찍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제가 00번에 찍었는데 잘 찍혔나요?”

비밀 선거가 원칙인 나라에서 투표소 직원에게 내가 찍은 표를 보여주며 물어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공보, 투표 보조 용구, 기표 확인과 관외자 투표 시 점자 투표 보조 용구 제공 문제까지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선거는 난리판이다.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를 번갈아 가며 10년 넘게 투표했다. 앞서 말한 시각장애인 유권자 선거 참여 문제는 꾸준히 지적됐고 여전히 이 모양이다.

법 만들고 손질하는 사람들 뽑는 총선이다. 21대 국회에 배지 달고 들어가는 양반들은 일 좀 열심히 해서 대통령 선거와 지방 선거가 동시에 치러지는 2022년에 달라진 풍경을 만들어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