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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05 초조함은 있는 것도 사라지게 만든다.
글
초조함은 있는 것도 사라지게 만든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중.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졌고, 회의 시간에 늦을 상황이라 초조했다. 여전히 대학 병원에서 수납하고 진료받는 일은 익숙하지 않아 허둥댔다. 수납을 위해 번호표 발급 기기를 찾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허둥거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회의 시간 때문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무인 수납 단말기 앞에서 “카드 수납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분을 만났다. 분명 병원 직원이셨겠지만, 그녀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리는 표식을 내 시력으로 발견할 순 없었다. 번호표 뽑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바로 결제할 수 있다는 말이 너무나 반가웠다. 카드를 건네주고 결제를 마쳤다.
차를 호출하고 빨리 배차되길 바라며 서성였다. 도착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이 회의 시작 시각이 지나고 있었다.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조급한 마음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려는데 없었다. 늘 넣어두는 곳에 당장 꺼내서 내밀어야 하는 카드가 없었다. 난감했고 당황스러웠다. 회의 장소에 도착한 분에게 급히 전화해서 결제를 대신 부탁했다. 카드를 어디서 분실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카드를 꺼낸 건 병원에서 결제할 때뿐이니 거기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회의에 지각해서 집중도 못 하고 또 허둥거렸다. 카드 분실 신고부터 하라는 말에 ARS로 분실 신고를 접수했다. 그 과정에서 안내 멘트를 다 듣지도 않고 서두르다가 끊고 다시 전화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회의를 마치고 병원에 연락해서 분실물을 확인했지만, 잃어버린 카드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교통 카드 기능이 있는 신용 카드였는데 분실해서 버스를 못 탈 상황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재발급 신청한 카드를 받았다. 이전 카드는 카드 번호가 양각되어 있어 지갑에서 꺼낼 때 촉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 배송된 카드는 여느 카드와 같이 양각된 것 없이 매끈해서 불편했다. 잃어버린 카드가 더 아쉽게 느껴졌다.
“카드를 한 장만 대주십시오.”
교체 받은 카드를 지갑에 넣고 버스를 탈 때 예상 못 한 단말기 안내 멘트가 나왔다. 자리에 앉아 지갑을 뒤적이니 잃어버린 줄 알았던 번호가 양각된 카드가 다른 곳에 꽂혀있었다. 반갑고 황당하고 분실 신고하고 재발급까지 받았는데 이 카드는 쓸 수 없겠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그날, 왜 그렇게 나는 여러 번 허둥거렸을까…. 뭐가 그리 초조했을까…. 중요한 회의였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자리였지만, 넉넉히 이해해줄 분들과 같이하는 회의였는데 말이다. <철학자와 하녀>의 한 대목이 떠오른 건 아직 버리지 못한 손에 익숙한 카드를 만지며 그날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잘될지 어떨지 가늠하기 어려운 행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일까? 초조하다. 몇 개월 마음 쓴 행사다. 잘 안된다고 세상이 무너지거나 내가 죽고 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들인 시간이 있고 잘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마음 써준 분들이 있다.
- 내가 하는 일이 나는 아니다. 일에 대한 평가가 나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읽은 글에서 만난 메시지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전히 전부 받아들이지 못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일이 아니면 나를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찾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초조함과 조급함은 거기에서 나온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나라는 사람을 전부 보여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일에 대한 평가가 부분적으로 그 일을 한 나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역시 일부일 뿐이다. ‘나’는 ‘일’이 아니다.
연휴가 시작할 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적었다. 연휴가 끝나는 지금, 그 일 중 처리한 일은 없다. 연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마음을 내리누르던 일들이었다. 내일이 조금 더 바빠지겠지만,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초조해할 일은 아니다.
지갑에 있는 카드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초조함에 사로잡힌 헛손질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애쓰되 힘주지 않도록 하자. 장그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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