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2009. 10. 13. 17:53

(후기) 난생 처음 본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

 

 

뮤지컬... 그건 어쩐지 오페라와 함께 평범한 이들이 접하기 어려운 장르의 예술이란 느낌이 먼저 드는 아닐까? 머릿속에 뮤지컬이란 움직이며 노래하고 간간이 대사도 하며 연극도 아닌 것이 노래도 아닌 그런 이미지였다. 천원 하는 영화도 쉽사리 보지 않게 내게 뮤지컬이란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그런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시각 청각장애인을 위한 뮤지컬 공연이 있다는 얘기에 반신반의했고 '무료'라는 얘기에 쓰러져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를 보러 가겠노라 덥썩 얘기하고 말았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서태지 전국 투어 콘서트나 그런 공연이었으면 대답하고 찜찜하진 않았을텐데... 당시엔 대답해놓고도 찜찜한 기분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가겠다고 대답하고 잊어버리고 지내다 공연 당일 오후에 공연이란 얘기를 듣고 밀려 있던 일에 삐걱거리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518 회관으로 향했다.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공연이란 특징 때문이었을까? 함께 타고 버스 안의 대부분이 시청각 장애인들이었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 해야 하나 난감해 하고 있을 점자로 제작된 공연 소개 책자를 받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뮤지컬 공연이라고 해서 공연 자체가 달리 기획되거나 연출되는 것은 아니고 시청각 장애인들이 공연의 내용을 청각과 시각을 통해인할 있도록 장면 해설과 수화 통역이 제공되는 방식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의 장면해설을 위해 제공된 동시통역 기기(?)를 받아들고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동시통역 기기라고 해서 외국인이 말하면 자동으로 통역되는 기계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상은 동시통역자의 목소리를 수신할 있는 수신기다. 여하튼 이번 뮤지컬의 장면 해설을 위해 낯익은 성우(이름은 까먹었음ㅎ) 한 분과 수화통역사 두 분이 수고해주시며 공연은 시작 되었다.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는 임진왜란 당시 모함을 당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기간 중 난중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3일의 행적을 가상으로 구성하여 왜군 무사 '사스케'에게 사로잡힌다는 설정으로 3일 간의 행적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공연이 시작되고 이순신 역을 맡은 배성우씨의 관객들에 대한 재치있는 부탁 말씀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뮤지컬은 시작되었다.  뮤지컬은 이순신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막딸의 속사포같은 경상도 사투리가 어울리며 공연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몸이나 시각적인 요소들로 관객의 몰입을 유도했다면 별다른 감흥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이순신의 '씨벌놈아'로 상징되는 맛깔스런 사투리와 배우들의 자연스런 연기들로 나도 모르게 공연에 빠져들 수 있었다.

 

장면 해설의 경우 무대의 조명 변화를 빠짐없이 설명해주고 주요한 장면들과 배우들의 움직임들을 간략하게 설명해줌으로써 내가 확인할 수 없었던 무대 전반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시력이 전혀 나오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이 공연을 관람했을 때 어느 정도 그려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조명 변화에 대한 설명이 후반부에서 간간이 빠졌고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던 무대 위의 배우들 움직임들에 대한 해설이 아쉬웠던 때가 몇 차례 있었는데... 사실 자세한 해설은 공연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한지라 어느 정도가 적절한 장면 해설인지는 나 역시나 가늠하기 어렵다.

 

공연 얘기로 돌아가서 이순신 역의 배성우씨 만큼이나 인상 깊은 배우는 막딸 역과 요오코 역을 동시에 소화한 최선미 씨였다. 막딸은 억척스런 경상도 여인으로 전쟁통에 가족을 모두 잃고 어디론가 사라진 개를 돌려보내달라고 삼신할매에게 비는 엉뚱한 케릭터다. 반면 요오코는 주연 중 한 명인 왜군 무사 사스케가 사랑하는 여인으로 요염한 이미지의 일본 여성의 역할이다. 요오코는 '에이효'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는 사스케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케릭터로 '에이효'는 요오코와 사스케가 서로에 대해 느끼는 애절한 감정들을 표현하듯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나는 분위기의 음악이다.

 

억척스런 막딸의 속사포같은 경상도 사투리 대사와 전혀 상반된 애절한 음악과 다소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와 대사 연기를 너무나 자연스럽고 훌륭하게 소화해낸 최선미님...

 

이순신과 막딸의 대사와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서일까? 주연 가운데 한 사람인 사스케역의 박주형님은 크게 부각되지 못한 느낌이다. 우선 목소리 크기부터 이순신과 막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던게 그런 느낌을 준 것 같고 거기에 요오코에 대한 애타는 마음과 우울한 분위기의 케릭터가 더해져 상대적으로 인상이 좀 약했던 것 같다.

(공연 시작 전에 성우분께서 사스케 역을 맡으신 박주형님이 꽃미남이라 그랬었는데...ㅎ 그 외모를 확인하실 수 있는 분들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다._)

 

이 공연은 '뮤지컬'답게 인상 깊은 곡들이 몇 곡 있는데 예를들면 이순신이 넉살좋게 부르는 '늙은 놈이 굶어야지'나 공연 끝 무렵 막딸과 사스케 그리고 이순신이 함께 부르는 '헤어질 시간'은 잔잔한 피아노로 시작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헤어질 순간의 아쉬움을 듬뿍 느끼게 해주는 노래였다.

 

공연의 마무리는 멀티맨이 나와 물대포 난사와 방패찍기 같은 포졸(전투경찰)들의 행태를 아뢰고 이순신이 호통치며 광화문 동상처럼 무대가 솟아나며 끝을 맺는다.

 

난생 처음 본 뮤지컬은 적절한 장면 해설이 더해져 불편한 느낌없이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역시나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장애'는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었다. 장면을 설명해 줄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수신기 하나만 있다면 큰 불편함 없이 뮤지컬을 '즐길 수 있는' 것에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무대 위의 공연과 무대 옆의 수화통역사들의 수화를 쉴 새 없이 봐야 하는 청각장애인들의 '지루함'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단순히 접근할 수 없는 '음성정보'를 '수화통역'으로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고민일 수도 있고 좀 더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 있을 수도 있는 문제니까...

 

난생 처음 본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는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과 재밌는 대사들 그리고 적절한 음향효과가 더해져 푹 빠져들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