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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사건과 하인리히의 법칙
큰 재해가 일어나면, 그 전에 작은 재해가 29번, 사소한 사고가 300번 앞서 일어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이 떠오른다. N번방 사건 이전에 일어났던 단톡방 성희롱 사건들과 대화방에서 오고 간 수많은 성폭력 대화들, 만연한 불법 촬영물 공유 사이트가 연상됐기 때문이다. 바빠서 넘어가고 다들 그러니까 눈감으며 지나가는 사이 경미한 사고와 사소한 사고가 익숙하게 묻힌다. 농담인데 뭘 그리 정색하냐는 말에 묵살되고 다들 좋다는데 너만 유난 떤다며 핀잔주는 사이 성폭력 문화는 몸으로 스민다.
N번방 사건에서 하인리히의 법칙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N번방 방지법 통과 그러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N번방 사건이 일단락되고 있다. 주범과 공범들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N번방 사건과 같은 사이버 성폭력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관련 법 개정도 이루어졌다. 통과된 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세부 논의와 N번방에 참여한 사람들에 관한 처분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듯하다.
뭔가 된 것 같은데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다. 기시감 때문일까?
-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사건이 크게 보도된다. - 철저한 수사와 엄중한 처벌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한다. - 경찰은 수사하고 국회는 000 방지법을 논의한다. - 가해자는 처벌받고, 관련 법은 통과된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패턴 아닌가? 도가니 사건부터 최근이 일어난 이천 물류창고 폭발 사건까지 경악할 사건 뒤에는 으레 볼 수 있던 패턴이다. 의미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책임을 묻고 관련 법을 개정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다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또 일련의 익숙한 패턴은 유효한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기술과 법으로 수렴되는 대책, 어렵다.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은 으레 법률 제/개정이 따라온다.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범죄는 기술적 조치가 더해진다. 쉽게 이해하기 어렵거나 복잡한 내용이 많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이목은 피의자 처벌이 어느 정도인지 또 재판에서 어떻게 판결되었는지까지만 집중되기 일수다. 재발 방지를 위한 법 제/개정 내용과 사이버 성폭력을 막기 위한 기술적 조치에 관한 내용은 복잡하고 간결하지 않다. 과하다는 지적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되기 일수다. 예컨대, 2019년 해외 아동 음란물과 불법 영상물, 도박 사이트 접속을 차단하기 위해 취해진 SNI 차단 조치가 그렇다. 한쪽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인터넷 접속까지 들여다본다’라는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이 제기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SNI 우회 방법이 공유되며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는 조치였다. 논란에 관한 의견 이전에 SNI 차단 조치가 무엇인지부터 이해하기 어렵다. 적절한 조치냐 과도한 것이냐 하는 공방을 보다 보면 어지러워진다.
작게! 빈틈없이! 빨리!
법은 느리다. 관련 조치는 늘 빈틈이 있다. 각종 ‘방지법’은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나고 피해가 심각해진 뒤에 만들어진다. 관련 조치는 늘 피해가거나 새로운 수법 앞에 무력해진다.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N번방 성 착취로 커질 때까지 재발 방지를 위한 법은 제/개정되지 않았다. 텔레그램은 보안이 뛰어나다는 낯선 이름의 메신저로 대체된다. 법과 기술적 조치가 뒤쫓기만 하는 톰이라면 빈틈을 찾고 우회하는 범죄는 늘 앞서 달려가는 제리와 같다.
모든 시민에게 적용되는 ‘법’을 만들고 바꾸는 일이니, 신중하고 더딜 수밖에 없고, 쏟아지는 새로운 기술 앞에 법적 근거에 따라 취할 수 있는 조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 법 통과 이전의 내 생각과 일상이 법 통과 이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면 N번방 방지법은 내게 큰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포르노는 똑똑하게 포장된 성적 자극이다. 각각의 링크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도로로, 수천 개의 포르노 시나리오 속 수천 명의 여성들에게로 당신을 안내한다. 많은 남성들이 노트북을 열고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단 하나의 이미지만 찾아 그 이미지만 보고 끝내는 법이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검색을 한다. 그들이 몇 시간 동안이나 인터넷을 뒤지는 이유는 실은 성적으로 자극적인 무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검색 자체, 다양한 옵션 자체다.
지난겨울 읽었던 <포르노 판타지>의 메모 중 하나다. 읽으면서 순간순간 부끄러웠다. 외면하지 않고, 잊지 말고, 좀 더 자주 옮겨 적은 메모를 꺼내 읽는 일. 그게 300번째 사소한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지 모른다. 29번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앞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일인지 모른다.
N번방 사건은 지금까지처럼 ‘처벌’과 ‘관련 법 통과’로 그렇게 잊히지 않으면 좋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분노한 사람들의 작은 일상의 변화로 남겨지면 좋겠다. 검색 안 하고 클릭 안 하는 일,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면 되는 일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누이고 편히 쉴 수 있는 방. 그렇게 모두가 ‘안전한 방’에서 쉴 수 있도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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