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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첫 번째 알람이 울린다. 눈은 떴지만, 이불 밖으로 나가진 않는다. 스마트폰을 켜고 웹서핑을 한다. 두 번째 알람이 울린다. 여전히 이불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대신 웹서핑을 멈추고 도서 앱을 연다. 밀도 높은 글을 읽으니 더는 누워있을 수 없다. 라디오 앱을 실행하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욕실에 간다.
다음 주가 임용 시험인데 딸이 밤에 잠을 못 자며 마음고생 중이다. 그걸 아는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티 나지 않게 딸에게 힘이 되어주는 일. 1년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한 딸이 시험에 합격해서 또래들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살았으면 좋겠다.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문득 그 딸이 어떤 마음일까 생각했다. 정해진 날짜에 월급이 들어온다는 게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지 안다. 출퇴근하며 ‘직업’란에 ‘교육 공무원’이라고 체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지 짐작된다. 임용을 준비하는 딸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잠시 그 안정감과 뿌듯한 자존심을 간절한 마음으로 욕망했다.
커피와 케익 세트 쿠폰을 선물로 보내준다는 진행자의 말과 음악이 이어졌고, 나는 바디 워시 거품을 씻어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었다. 그렇게 딸의 마음은 다시 내 마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래된 TV에 잔상이 맺히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스친 간절한 욕망은 채 가시지 않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소할지 고민됐다. 진지하게 생각하면 욕망에 불이 붙어 수습할 수 없을 거 같고, 모른 척 지나가기엔 너무 생생해서 아까웠다. 글을 쓰기로 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단체 활동을 결의하며 출퇴근하는 삶을 사양했다. 종종 나는 그 선택을 달리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믿을 수 있는 이들과 의미 있는 일을 함께하는 곳에서 안정적으로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사뭇 비장한 마음으로 결의했던 단체 활동은 불안정한 생활과 쉽지 않은 대학원 공부에 밀려 사소해졌다. 모처럼 가슴 뛰게 했던 대학원 진학은 주눅 들게 만드는 강의를 만나며 열기가 식었다. 나는, 대단한 사람도 뛰어난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만 선명하게 알았다.
가능하면 오래 활동해온 단체 소속으로 나를 소개하지 않는다. 대학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도 밝히지 않는다. 그렇게 단체와 학교를 빼고 나니 온전한 내가 남는다. 단체를 배경으로 삼을 때의 비장하고 멋져 보이는 이미지도, 대학원을 배경으로 삼았을 때의 꽤 똑똑할 것 같은 환상도 빼고 나면, 표현하기 불편한 내가 남는다. 이를테면, 40대 1인 가구 중증 장애 남성 같은 것.
그렇게 남아있고 싶지 않아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가끔 빛이 났고, 매일 지난하다. 멀리 보면 괴롭고 그래서 하루하루만 생각한다. 집어 들지 않은 선택지는 떠올리지 않으려 한다. 버린 선택지에는 ‘욕망’이라는 두 글자가 똑같이 적혀 있으니까…
뭔가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어떤 것을 욕망해야 생겨난다. 나는, 오늘을 넘어서는 현실적으로 내가 얻기 힘든 것을 바랄 때마다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욕심’은 부정적인 것임으로 버리는 것은 정당했다. 포기가 빠를수록 간절함도 덜 해갔다. 간절한 마음이 아니라 정당한 명분으로 채워진 나의 활동이 점점 위태롭게 느껴졌다. 다행히 아직 글을 쓸 땐 간절하고, 어떤 활동을 생각하면 가슴 뛴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과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을 기획하고 해내고 싶다. 그 욕망으로 기대하고 실망하며 또 간절해지는, 내 삶을 생생하게 만드는 감각을 잃지 않고 싶다. 지나버린 것에 대한 욕망 대신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갈망하는 것.
그렇게 간절함이라는 감각을 잃지 않고, 생생한 글을 쓰며, 좋은 이들과 함께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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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파 배우의 산책길
겨울이 오고 있다. 스치는 바람이 차갑고, 6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겨울이 느껴진다. 한 달에 15일만 매일 1만 걸음을 걸으면 5,000원 캐시백을 해준다는 카드에 힘입어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바람도 차갑고 어두우니 기왕이면 햇볕 좋고 밝은 낮에 걸으면 좋으련만 그게 잘 안 된다. 오늘도 6시 넘어 어둑어둑한 산책길을 걸었다.
산책할 때 음악을 듣거나 읽은 책 메모 내용을 mp3로 변환한 파일을 들으며 걷는다. 저시력인 내가 이어폰까지 끼고 어두운 산책길을 걷는 게 위태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산책하며 사람과 부딪친 일은 거의 없다. 대게는 나를 본 사람들이 피해서 갔고 나 또한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멈추거나 천천히 걸으며 주의했다. 내가 부딪칠 위험을 겪을 때는 산책 나온 어린아이 또는 강아지를 만났을 때다. 그 존재들은 나를 보고 피해 주지 않거나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도 하니까… 그런데 오늘 산책길에서 강아지도 어린아이도 아닌 성인 남성인 듯한 사람과 왼쪽 어깨 아래를 제대로 부딪쳤다. 사실 부딪친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부딪친 뒤 내가 돌아서서 허리를 굽혀 미안함을 표했을 때 아무 말 없이 정적이 흐른 것 때문에 중년 남성이었을 거로 추측하는 거다. 부딪쳤을 때를 생각하면, 내가 그 사람보다 키가 크고, 어두운색 마스크를 낀 채 점퍼에 달린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내가 좀 무섭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허리를 굽혀 미안함을 표한 뒤에도 아무 인기척이 없었는데 멀리 가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니까…
갑자기 무서운 느낌이 확~ 밀려왔는데, 어쩐지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뒤돌아서 가던 길을 걷는데 자꾸 뒤에서 중년 남성이 막 소리치며 쫓아올 것만 같아 무서웠다. 발걸음을 빨리해 산책길을 벗어났다. 집 근처 산책길과 이어진 다리까지 두 번 돌면 1만 걸음을 걸을 수 있다. 1만 걸음을 채우기 위해 두 번째로 산책길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여전히 아까 그 남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이어폰을 더 꼭 끼고 볼륨을 조금 더 크게 높이며 걸었다. 키가 있으니까 못 들은 척 지나가도 선뜻 나를 잡아 새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진작 떠났기 때문인지 나에게 화를 내며 달려드는 중년 남성은 없었다.
저시력인 내가 누군가와 길에서 부딪치는 일은 거의 없다. 간혹 부딪친다 해도 그건 나와 부딪친 사람이 휴대폰을 보며 걷거나 대화를 나누며 다가오다가 나를 보지 못하고 부딪친 때였다. 사람 목소리가 들리거나 눈에 들어오면 일단 천천히 걷거나 잠시 멈추니 나 때문에 사람과 부딪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와 부딪치면 반사적으로 사과부터 하는데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 차원만은 아니다. 그야말로 반사적으로 사과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얼른 사과해서 내 시력이 드러나지 않도록 빨리 수습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경험상 내 시력이 ‘드러나서’ 좋은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오늘 나와 부딪친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말없이 허리를 좀 굽혀 사과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 것만으로 불쾌함이 가시지 않았을까? 밤에 길을 걷다가 부딪친 사람이 어두운 마스크와 점퍼 모자까지 뒤집어쓴 키 큰 남자라서 놀랐을까?
누군가와 부딪치는 일은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조금 강하게 부딪치는 일도 드문드문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어둑어둑한 시간에 부딪혀 조금 더 상대방이 조심스럽게 느껴진 것뿐이다. 그러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저녁인 거다.
그럭저럭 내 시력은 적당히 드러나지 않은 듯한 저녁 산책길. 나는 어느새 몸에 스민 내 뛰어난 연기력을 생각해본다.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발휘되지만, 혼자 곰곰이 생각하면 씁쓸하고 심란한 그것…..
집 근처 산책길을 연기파 배우가 되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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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함은 있는 것도 사라지게 만든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중.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졌고, 회의 시간에 늦을 상황이라 초조했다. 여전히 대학 병원에서 수납하고 진료받는 일은 익숙하지 않아 허둥댔다. 수납을 위해 번호표 발급 기기를 찾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허둥거렸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고, 회의 시간 때문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무인 수납 단말기 앞에서 “카드 수납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분을 만났다. 분명 병원 직원이셨겠지만, 그녀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리는 표식을 내 시력으로 발견할 순 없었다. 번호표 뽑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바로 결제할 수 있다는 말이 너무나 반가웠다. 카드를 건네주고 결제를 마쳤다.
차를 호출하고 빨리 배차되길 바라며 서성였다. 도착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이 회의 시작 시각이 지나고 있었다.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조급한 마음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했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려는데 없었다. 늘 넣어두는 곳에 당장 꺼내서 내밀어야 하는 카드가 없었다. 난감했고 당황스러웠다. 회의 장소에 도착한 분에게 급히 전화해서 결제를 대신 부탁했다. 카드를 어디서 분실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카드를 꺼낸 건 병원에서 결제할 때뿐이니 거기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회의에 지각해서 집중도 못 하고 또 허둥거렸다. 카드 분실 신고부터 하라는 말에 ARS로 분실 신고를 접수했다. 그 과정에서 안내 멘트를 다 듣지도 않고 서두르다가 끊고 다시 전화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회의를 마치고 병원에 연락해서 분실물을 확인했지만, 잃어버린 카드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교통 카드 기능이 있는 신용 카드였는데 분실해서 버스를 못 탈 상황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재발급 신청한 카드를 받았다. 이전 카드는 카드 번호가 양각되어 있어 지갑에서 꺼낼 때 촉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 배송된 카드는 여느 카드와 같이 양각된 것 없이 매끈해서 불편했다. 잃어버린 카드가 더 아쉽게 느껴졌다.
“카드를 한 장만 대주십시오.”
교체 받은 카드를 지갑에 넣고 버스를 탈 때 예상 못 한 단말기 안내 멘트가 나왔다. 자리에 앉아 지갑을 뒤적이니 잃어버린 줄 알았던 번호가 양각된 카드가 다른 곳에 꽂혀있었다. 반갑고 황당하고 분실 신고하고 재발급까지 받았는데 이 카드는 쓸 수 없겠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그날, 왜 그렇게 나는 여러 번 허둥거렸을까…. 뭐가 그리 초조했을까…. 중요한 회의였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자리였지만, 넉넉히 이해해줄 분들과 같이하는 회의였는데 말이다. <철학자와 하녀>의 한 대목이 떠오른 건 아직 버리지 못한 손에 익숙한 카드를 만지며 그날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잘될지 어떨지 가늠하기 어려운 행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일까? 초조하다. 몇 개월 마음 쓴 행사다. 잘 안된다고 세상이 무너지거나 내가 죽고 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들인 시간이 있고 잘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마음 써준 분들이 있다.
- 내가 하는 일이 나는 아니다. 일에 대한 평가가 나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읽은 글에서 만난 메시지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여전히 전부 받아들이지 못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일이 아니면 나를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찾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초조함과 조급함은 거기에서 나온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나라는 사람을 전부 보여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일에 대한 평가가 부분적으로 그 일을 한 나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역시 일부일 뿐이다. ‘나’는 ‘일’이 아니다.
연휴가 시작할 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적었다. 연휴가 끝나는 지금, 그 일 중 처리한 일은 없다. 연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마음을 내리누르던 일들이었다. 내일이 조금 더 바빠지겠지만,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초조해할 일은 아니다.
지갑에 있는 카드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초조함에 사로잡힌 헛손질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애쓰되 힘주지 않도록 하자. 장그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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