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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담 한 병, 과분한 의미
“제가 못하는 의미 있는 일하시니까…”
종종 가는 약국 약사님이 이런 말과 함께 쓸기담 한 병을 주셨다. 약사님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한 건 언젠가 TV에서 나를 봤다고 말씀하신 다음부터다. 과분하게 운이 좋은 나는 종종 언론을 타는 경우가 있는데, 그 덕분인 것 같았다. 쓸기담 한 병을 들고 약국을 나오며 문득 어느 시가 생각났다.
함민복의 ‘긍정적인 밥’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 2006년 11월 10일
병원에서 새로 처방받아 먹기 시작한 약병을 보이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되돌릴 수 있을까 약사님께 물었다. 친절하게 이 지역에서 ‘간’하면 알아주는 선배 약사 연락처를 내 스마트폰으로 찍어 건네주셨다.
한 봉지 가득한 약과 눕고만 싶은 몸을 끌고 약국을 나오며 생각했다. 민망한 내 활동이 잠시 피로라도 씻어주는 쓸기담 한 병 만큼의 힘은 되고 있을까… 부끄럽게 너무 주목받으며 살았던 건 아닐까…
민망하고 부끄럽게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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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방
N번방 사건과 하인리히의 법칙
큰 재해가 일어나면, 그 전에 작은 재해가 29번, 사소한 사고가 300번 앞서 일어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이 떠오른다. N번방 사건 이전에 일어났던 단톡방 성희롱 사건들과 대화방에서 오고 간 수많은 성폭력 대화들, 만연한 불법 촬영물 공유 사이트가 연상됐기 때문이다. 바빠서 넘어가고 다들 그러니까 눈감으며 지나가는 사이 경미한 사고와 사소한 사고가 익숙하게 묻힌다. 농담인데 뭘 그리 정색하냐는 말에 묵살되고 다들 좋다는데 너만 유난 떤다며 핀잔주는 사이 성폭력 문화는 몸으로 스민다.
N번방 사건에서 하인리히의 법칙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N번방 방지법 통과 그러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N번방 사건이 일단락되고 있다. 주범과 공범들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N번방 사건과 같은 사이버 성폭력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관련 법 개정도 이루어졌다. 통과된 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세부 논의와 N번방에 참여한 사람들에 관한 처분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듯하다.
뭔가 된 것 같은데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다. 기시감 때문일까?
-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사건이 크게 보도된다. - 철저한 수사와 엄중한 처벌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한다. - 경찰은 수사하고 국회는 000 방지법을 논의한다. - 가해자는 처벌받고, 관련 법은 통과된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패턴 아닌가? 도가니 사건부터 최근이 일어난 이천 물류창고 폭발 사건까지 경악할 사건 뒤에는 으레 볼 수 있던 패턴이다. 의미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책임을 묻고 관련 법을 개정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다만, 그것으로 충분한지 또 일련의 익숙한 패턴은 유효한 것인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기술과 법으로 수렴되는 대책, 어렵다.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은 으레 법률 제/개정이 따라온다.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범죄는 기술적 조치가 더해진다. 쉽게 이해하기 어렵거나 복잡한 내용이 많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이목은 피의자 처벌이 어느 정도인지 또 재판에서 어떻게 판결되었는지까지만 집중되기 일수다. 재발 방지를 위한 법 제/개정 내용과 사이버 성폭력을 막기 위한 기술적 조치에 관한 내용은 복잡하고 간결하지 않다. 과하다는 지적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되기 일수다. 예컨대, 2019년 해외 아동 음란물과 불법 영상물, 도박 사이트 접속을 차단하기 위해 취해진 SNI 차단 조치가 그렇다. 한쪽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인터넷 접속까지 들여다본다’라는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이 제기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SNI 우회 방법이 공유되며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는 조치였다. 논란에 관한 의견 이전에 SNI 차단 조치가 무엇인지부터 이해하기 어렵다. 적절한 조치냐 과도한 것이냐 하는 공방을 보다 보면 어지러워진다.
작게! 빈틈없이! 빨리!
법은 느리다. 관련 조치는 늘 빈틈이 있다. 각종 ‘방지법’은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나고 피해가 심각해진 뒤에 만들어진다. 관련 조치는 늘 피해가거나 새로운 수법 앞에 무력해진다.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N번방 성 착취로 커질 때까지 재발 방지를 위한 법은 제/개정되지 않았다. 텔레그램은 보안이 뛰어나다는 낯선 이름의 메신저로 대체된다. 법과 기술적 조치가 뒤쫓기만 하는 톰이라면 빈틈을 찾고 우회하는 범죄는 늘 앞서 달려가는 제리와 같다.
모든 시민에게 적용되는 ‘법’을 만들고 바꾸는 일이니, 신중하고 더딜 수밖에 없고, 쏟아지는 새로운 기술 앞에 법적 근거에 따라 취할 수 있는 조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 법 통과 이전의 내 생각과 일상이 법 통과 이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면 N번방 방지법은 내게 큰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포르노는 똑똑하게 포장된 성적 자극이다. 각각의 링크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도로로, 수천 개의 포르노 시나리오 속 수천 명의 여성들에게로 당신을 안내한다. 많은 남성들이 노트북을 열고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단 하나의 이미지만 찾아 그 이미지만 보고 끝내는 법이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검색을 한다. 그들이 몇 시간 동안이나 인터넷을 뒤지는 이유는 실은 성적으로 자극적인 무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검색 자체, 다양한 옵션 자체다.
지난겨울 읽었던 <포르노 판타지>의 메모 중 하나다. 읽으면서 순간순간 부끄러웠다. 외면하지 않고, 잊지 말고, 좀 더 자주 옮겨 적은 메모를 꺼내 읽는 일. 그게 300번째 사소한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지 모른다. 29번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앞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일인지 모른다.
N번방 사건은 지금까지처럼 ‘처벌’과 ‘관련 법 통과’로 그렇게 잊히지 않으면 좋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분노한 사람들의 작은 일상의 변화로 남겨지면 좋겠다. 검색 안 하고 클릭 안 하는 일,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면 되는 일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누이고 편히 쉴 수 있는 방. 그렇게 모두가 ‘안전한 방’에서 쉴 수 있도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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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잃으면, 공감할 수 없다
트위터에서 공감 가는 글을 볼 때가 있다. 글자 수 제한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그 아래로 계속되고, 사람들이 답글처럼 잇는 내용도 표시된다.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검찰 또는 경찰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이나 특정 사안에 관한 온라인 지지를 부탁하는 답글이 보이곤 했다. 물론 원 글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것들이다.
“이 트윗을 읽어는 보고 답을 달았을까?”
처음엔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저 내용이 얼마나 절박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런 맥락을 잃은 일방적인 답글을 트위터에서 자주 마주치며 불편함이 느껴졌다.
”별이 왜 빛나는 지 아나요?"
"아뇨"
“이제 당신이 그걸 지구에서 2번째로 알게될거에요."
별이 빛나는 이유 (핵융합)을 밝힌 프리츠가 별 중심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을 밝혀낸 다음 날 애인에게 했던 말입니다.
https://twitter.com/loveyourselfa01/status/1266792543766761473?s=21
이 세상 모든 플러팅 봇 on Twitter
“"별이 왜 빛나는 지 아나요?" "아뇨" “이제 당신이 그걸 지구에서 2번째로 알게될거에요." 별이 빛나는 이유 (핵융합)을 밝힌 프리츠가 별 중심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을 밝혀낸 다음 날 애인에��
twitter.com
이 트윗에 달린 답 중 첫 문장을 읽자마자 불편함이 확 느껴진 트윗이 있었다. 다른 답글 트윗은 정확하게 이 말을 누가 누구에게 했는지 같은 원 글과 맥을 잇는 내용이었는데, 글도 안 읽고 보낸 것 같은 답글이었다.
- 수사관님들께! 본인들 자녀가 성폭행 당해도 무마 덮겠습니까??
아래로는 청와대 국민 청원 URL과 함께 몇 마디가 더 있었다. 첫 문장에서 그만 마음이 닫히는 느낌을 크게 느꼈는데, <깨끗한 존경>에서 만난 이 인터뷰 때문이다.
정: 유족들이 입 밖에 절대로 내지 않는 말이 있어요. 아무리 입안에 맴돌아도 그 말은 안 해요. “너도 한 번 당해 봐”라는 말이에요. “시신 장사 하냐”는 말을 들으면 ‘당신도 한 번 겪어보세요’라는 말이 여기까지 올라 오는데도 있는 힘을 다해서 참아요.
그 분들은 ‘당신도 당해 봐라’가 아니라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지 마세요’ 라고 말해 요. 저는 이것보다 숭고한 인간의 마음은 없다고 생각해요. 유족들은 말하죠. ‘재난이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 다’고요. 저는 사람들이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을 수 있다면 세상은 변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 뒤에 있는 세계, 그 고통을 생각하면 사회뿐 아니라 우리의 차가워진 인간성도 변해요.
https://ridibooks.com/books/852000721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서명을 받을 때든 캠페인을 할 때든, 더는 이 말은 하지 않는다.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역효과는 확실하기 때문이다. 부작용은 분명하다. 장애인이 된다는 게 무섭거나 원하지 않는 일로 느끼게 만드는 건 확실하다. ‘장애’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사회적 문제라고 말하려는데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듣는 순간 개인적으로 조심하거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든, 경찰은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사기 사건이든 성폭력 사건이든 관계없이 경찰은 모든 사건을 최선을 다해 수사하고 해결해야 한다. 수사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찰 일반이 갖는 의무다.
“수사관님들께! 본인들 자녀가 성폭행 당해도 무마 덮겠습니까??”
이 문장은 ‘너도 한번 당해볼래?’라는 말처럼 느껴져서 정말 불편했다.
그런데… 저 맥락 없는 답글 트윗이 정말 불편하게 느껴진 이유는, 그 트윗을 쓰는 누군가에게서 내 모습의 한 면을 본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쳇말로 진지 빨고 하는 내 말들이 맥락 없이 달린 저 답글 트윗 같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대화의 맥락을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돌아보니 내가 ‘해야 한다’라고 느낀 말을 사람들에게 너무 자주 토해 놓곤 했던 것.
맥락을 이어 내가 하려는 말을 한다는 건, 오가는 대화가 내가 하려는 말과 맥이 닿을 때를 기다리거나 내가 하려는 말을 할 수 있게 맥락을 만들어 말을 전한 뒤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일 거다.
뜬금없이 이어진 답글 트윗 덕에 내 말들을 돌아볼 수 있었으니, 맥락없는 트윗의 역효과는 확실히 난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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