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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발은 매끈할 수 없다
하루 1만 걸음을 걷는 날과 정비례하게 물집 잡힌 발가락도 하나둘 늘고 있다. 워킹화를 새로 산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걸음 수에는 장사 없는 모양이다.
하루 1만 걸음을 걷기 시작한 건 우습게도 그럴싸한 다짐 때문이 아니었다. 우연히 알게 된 토스(Toss) 만보기로 100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걷기 시작했다. 물론 전에도 산책은 했지만, 작심하고 하루 1만 걸음을 꼬박꼬박 걷게 된 건 100원짜리 동기부여 때문이다.
함께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을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걷기를 매일매일 하지 않았다. 같이 걷자고 말하지 않아도 꼬박꼬박 걷고 있는 지금은 함께 걸을 사람이 없다. 사람 대신 동전을 얻게 된 뒤에야 겨우 걷는 게 몸에 익은 일상이 되었다. 미련하기 그지없다.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친다.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으니 입은 꼭 다물고, 이어폰은 더 깊이 끼운다. 소음 제거 기능까지 실행하면, 스치는 사람들이 TV 속 사람처럼 그림같이 느껴진다. 외부 소리와는 단절된 채 흘러가는 물고기처럼 걷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비겁했던 순간들, 용기 없던 시간들, 부끄러웠던 모습들이 머릿속으로 떠오를 때마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 변명과 질책으로 머릿속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발끝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걸으면서 발가락엔 물집이 하나둘 생긴다.
징징거리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한바탕 소동을 똑바로 마주 보면 발가락에 굳은살이 박힌다. 내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굳은살 박힌 발가락은 울퉁불퉁하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품고 단단해진 마음은 올록볼록하다. 매끄럽게 예쁜 모양은 아니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은 시시포스 산의 바위처럼 산책할 때마다 되살아난다.
그저 걷는 수밖에 없다. 걷다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조금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담담하게 살필 수 있게 됐다. 굳은살이 박히고 올록볼록 못생긴 모양으로 단단해진 마음 덕이겠지.
성실한 발은 매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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